노각/ 유종인
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
한해살이 오이한테도
노년이 서리고
그 노년한테
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,
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
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
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
수박 향 같기도 하고
은어(銀魚) 향 같기도 한
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
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
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
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
아무려나
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
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
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
사랑이 그만치는
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
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
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
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
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
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
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
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
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
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
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
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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![최형심 시인](https://naewoeilbo.org/mir/news/photo/202405/953205_753813_1333.png)
모든 생명체가 생로병사를 경험하지만, 하루살이 곤충이나 한해살이 식물의 노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. 시인은 “노각”이라는 단어가 “한해살이 오이한테도/ 노년이 서리고/ 그 노년한테/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” “선선하고 넉넉한” 말이라고 기뻐합니다. 그러고는 “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/ 수박 향 같기도 하고/ 은어(銀魚) 향 같기도 한/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/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/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/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”한 향이 난다며 세월을 품은 향기를 노래합니다. 시를 읽고 있으면 “늙어 떠나며/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/ 누군가에게 벗어줄” 수 있는 노각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. 은어 향처럼 잔잔한 기억을 남기며 늙어가는 것도 멋진 일일 것 같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