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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칼럼
  • 기자명 최형심 시인

[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] 유종인의 ‘노각’ 해설

  • 입력 2024.05.21 12:13
  • 댓글 0

노각/ 유종인 

 

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

한해살이 오이한테도

노년이 서리고

그 노년한테

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,

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

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

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

수박 향 같기도 하고

은어(銀魚) 향 같기도 한

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

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

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

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

아무려나

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

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

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

사랑이 그만치는

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

 

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

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

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

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

은어 향에 밴 수박 향서껀

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

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

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

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

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

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

 

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

최형심 시인
최형심 시인

모든 생명체가 생로병사를 경험하지만, 하루살이 곤충이나 한해살이 식물의 노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. 시인은 “노각”이라는 단어가 “한해살이 오이한테도/ 노년이 서리고/ 그 노년한테/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” “선선하고 넉넉한” 말이라고 기뻐합니다. 그러고는 “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/ 수박 향 같기도 하고/ 은어(銀魚) 향 같기도 한/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/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/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/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”한 향이 난다며 세월을 품은 향기를 노래합니다. 시를 읽고 있으면 “늙어 떠나며/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/ 누군가에게 벗어줄” 수 있는 노각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. 은어 향처럼 잔잔한 기억을 남기며 늙어가는 것도 멋진 일일 것 같습니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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