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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칼럼
  • 기자명 최형심 시인

[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] 진이정의 ‘엘 살롱 드 멕시코’ 해설

  • 입력 2024.04.26 15:1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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엘 살롱 드 멕시코 / 진이정

 

엘 살롱 드 멕시코

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유년의 기지촌, 그 철조망을 넘는다

그리운 캠프 페이지, 이태원처럼 보광동처럼 후암동처럼 그리운 그리운

그립다라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

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

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

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

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

엘 살롱 드 멕시코가 그립다

난 왜 그리움 따위에만 허기를 느끼는 것일까

이태원을 무작정 배회하고 싶다

그나마 내 고향집 근처를 닮은 곳이기에

아마 난 뉴욕에서도 기지촌의 네온사인을 그릴 것이리라

후암동의 불빛이 보고파 눈물지었다는 맨해튼의 어느 교포 소녀처럼

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

내생에도 난 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리라

가슴에 매단 망각의 손수건으론 연신 업보의 콧물 닦으며

체력장과 사춘기 그리고 지루한 사랑의 열병을

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 앓아야만 하리라

, 난데없이 내 맘 속에서 인류애가 솟구친다

이 순간 내 욕정은, 그리움으로 잘 위장된 내 욕정은 온데간데 없다

이게 제정신인가

아님 무슨 인류애라는 신종 귀신이 날 덧씌운 것인가

그날 살롱 멕시코,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

딸라 한닢 없던 외삼촌만이 명랑하게 딸랑거렸다

샌드위치와 위스키를 시키고 나서

용케 합석시킨 지아이의 붉은 뺨에 뽀뽀하던 외삼촌,

그립다, 어수룩한 그 백인 병사마저

엘 살롱 드 멕시코

이젠 자꾸만 들어가고 싶은

그래 캠프 페이지 위병초소의 산타클로스와 함께

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 나,

성조기는 사라져도 그 단맛만은 영원하리라

나의 엘 살롱 드 멕시코를 적시는

외삼촌의 스트레이트 위스키처럼, 여태 숙취로 남은 그 취기처럼,

그 옛날의 그리움에 어느새 난 샌드위치되어 있다

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

엘 살롱 드 멕시코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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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형심 시인
최형심 시인

시인 진이정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절했습니다. 그는 유고 시집 한 권을 남겼습니다. 이 작품은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며 춘천 그의 집 앞에 자리 잡고 있던 미군 부대와 기지촌의 풍경을 노래한 시입니다. 이 작품 속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시인의 가여운 삶이 활자에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. 구절마다 새겨 넣은 유년의 아픈 기억도 기억이지만, 읽는 이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내 해탈한 뒤라도 그 그리움만은 영겁토록 윤회하리라라는 구절입니다. 그가 떠난지 30년이 지났지만,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그의 시는 남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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